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쇼 덴노 (문단 편집) === 결혼 생활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다이쇼 천황 부부.jpg|width=300]]}}}|| || 다이쇼 천황과 [[데이메이 황후]] || 할머니인 [[에이쇼 황후|에이쇼 황태후]](아사코)가 1897년 사망하여 [[성인식]]은 1898년에 치러졌다. 이때 다이쇼의 건강이 워낙 좋지 못해서 빨리 [[결혼]]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1900년 5월 10일, 황태자비로 간택된 [[고셋케]](오섭가)의 [[데이메이 황후|쿠죠 사다코]]와 결혼했다. 일본 황실은 황태자를 최대한 빨리 결혼시켜 자식을 낳게 할 생각이긴 했지만, 덕분에 답답한 궁중 생활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, 결혼 생활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. 아버지 [[메이지 덴노]]와는 달리 [[첩]]을 두지 않았는데, 건강한 사다코 황태자비(데이메이 황후)가 아들을 네 명이나 낳아서 첩을 둘 필요도 없었다. 다만 막내 [[다카히토]]는 늦둥이라서 즉위 당시 [[사다코 황후]]가 [[임신]] 상태라 즉위 이후에 태어났다. 이 무렵 그는 좀 병약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해 대단히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했다. 유년 시절이나 [[천황]]으로서 요시히토가 '모자란 인물'로 취급된 것과 대조되게 [[하라 다카시]]는 이 시절의 다이쇼 덴노에 대해 '''인간미 넘치는 인물상'''으로 묘사했다. [[독일 제국]] 출신의 [[의사]]였던 에르빈 폰 벨츠 또한 이 당시 요시히토에 대해 "[[유럽]]풍의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다"며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.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을 회복한 그는 [[메이지 덴노]]를 대신해 12년간 9차례에 걸쳐 [[오키나와]]를 제외하고 [[홋카이도]]를 포함한 전국을 순행했으며, 그의 교육을 담당했던 다케히토와 함께 순행길에 오르면서 [[한시]] 짓기를 즐겨했다고 한다. 1907년 그는 [[대한제국]]을 방문해 [[순종황제]]와 당시 황태자였던 [[영친왕]] 이은을 만났는데, 이때 이은을 마음에 들어해서 [[한국어]]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.[* 당시 [[대한제국]]은 형식적으로는 국가가 남아 있었으나 실제로는 [[을사조약]]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심지어 [[고종황제]]마저 [[헤이그 밀사사건]]으로 강제 퇴위당해 반불구 국가였다. 결국 오래가지 못해 일제에 완전히 병합되었다.] 이후 요시히토는 구미권을 방문하길 희망했으나 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